‘걸어도 걸어도(Still Walking)’는 2009년 국내 개봉된 일본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 아래 섬세하게 짜여진 가족 드라마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관객에게 회자되는 이 작품은, 당시에는 비교적 조용한 반응을 얻었지만 2020년대를 지나며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의 전통적 가족 구조를 섬세하게 풀어내면서도, 현대의 가족 해체와 상실의 정서를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걸어도 걸어도’가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미학, 그리고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영화에 대한 깊은 감상과 해석을 원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9년작 ‘걸어도 걸어도’가 다시 소환되는 이유
2009년 국내 개봉 당시만 해도 ‘걸어도 걸어도’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름 역시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영화는 조용히 상영되다 기억 속으로 묻혀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 영화는 의외의 방식으로 되살아났습니다. 바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오히려 ‘느림’과 ‘정적’이 귀한 가치로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전개가 느린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지만, ‘걸어도 걸어도’는 그 느림이야말로 관객이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만들어주는 장치였습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족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재조명이 이어지면서, 이 영화의 중심 테마가 더욱 주목받게 됐습니다. 단 하루 부모님 댁에 들른 가족의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은 겉보기엔 단조롭지만, 그 속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선이 촘촘히 얽혀 있습니다. 저마다 품은 후회, 상실감,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말 못 할 기대가 대사 사이로 스며들죠.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일상적인 대화 속에 섞인 무심한 말 한마디가 그 가족의 긴 세월을 응축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인생의 본질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OTT 재서비스 이후 이 영화를 처음 접한 20~30대 관객들이 “인생영화”라며 SNS에서 추천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 아닐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카메라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풍경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늘 ‘가족’을 이야기하지만, 그 방식은 아주 다릅니다. 그는 피를 나눈 관계가 아닌,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과 감정으로 가족을 규정하려 합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이런 태도는 여실히 드러납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들의 기일에 가족들이 모여 벌어지는 하루를 그리고 있지만, 실은 그 하루 동안 서로의 감정이 교차하고, 고요한 파동이 일어나는 시간을 따라갑니다. 이 작품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시선은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인물들을 가까이 다가가지도, 극적으로 흔들지도 않은 채 그저 관찰자처럼 따라가며,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둡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식탁 앞에서 벌어지는 대화들이었습니다. 정겨워 보이는 오징어 튀김 하나가 사실은 죽은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이고, 그 조리 과정이 어머니의 기억을 끌어내는 촉매가 됩니다. 고레에다는 이런 사소한 디테일을 통해 감정의 밑바닥을 건드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말보다 음식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어느 가족’처럼 구성상 더 드라마틱한 작품도 있지만, ‘걸어도 걸어도’는 가장 자전적인 감정이 녹아든 작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감독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제작한 영화라는 사실은 이 작품의 감정선에 대한 해석을 더욱 깊게 만들어줍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단순히 픽션이 아닌, 감독 개인의 기억과 애도 과정이자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기록이 됩니다.
‘Still Walking’이 던지는 조용한 질문들
영화 제목인 ‘Still Walking’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단순히 ‘걷고 있다’는 표현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영화 전체가 바로 이 정서로 관통됩니다. 가족은 한때 함께였지만, 상실과 오해로 균열이 생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영화 속 료타는 죽은 형의 그림자에 가려 부모의 애정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살아왔고, 그로 인한 거리감과 외로움이 매 장면에 서려 있습니다. 가족 사진에서 중심에 놓이지 못한 그의 위치, 무심코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말투 하나에도 그런 감정이 깃들어 있죠.
저는 이 장면들이 무척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종종 가족 내에서 불균형한 애정이나 역할 분담 때문에 상처받곤 하니까요. 고레에다는 이런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죽은 이는 말이 없지만, 살아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그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료타가 부모의 무덤 앞에서 걷는 장면은 그래서 더더욱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무언가를 화려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인생의 핵심을 조용히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가 그리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걸어도 걸어도’는 분명 특별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걷고 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
‘걸어도 걸어도’는 단순한 가족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무게를 아주 사소한 하루를 통해 보여주는 섬세한 기록이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묻는 조용한 질문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정교한 연출은 이 영화를 단순한 감상용 콘텐츠가 아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매개체로 만들어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고, 그 통화는 아주 오랜만에 진심이 오간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는 영화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오늘 저녁 ‘걸어도 걸어도’를 조용히 틀어보세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그 속에서 발견해 보시길 바랍니다.